얼마 전에 아내가 나에게 "우리 남편이 많이 변했어, 젊었을 때는 나만 생각해 주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다"라고 푸념을 하였다. 나는 "그럼 세월이 흐르는데 사람도 변해야지"하면서 말대답을 했다. 사실 이 말은 그전에 아내가 한 말을 돌려서 한 말이었다. 아내가 "그럼 애 셋 낳고 변하지 않으면 바보지, 바보랑 살고 싶어"라고 한 말을 되돌려 준 말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내가 결혼한 내 남편은 어디 갔는가?"라는 말이 있다. 처음 결혼했을 때 자기를 참으로 사랑해 주고, 자기만 위해주는 참으로 좋은 남편이었는데 몇 해 지나니까 그 남편이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그래서 "처음에 결혼했던 내 남편은 어디에 갔는가?"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아내에게도 할 수 있다. "내가 결혼한 내 아내는 어디 갔는가?" 처음엔 좋은 아내였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몇 해가 지나니까 사람이 변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를 보는 것 같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푸르던 잎은 붉게 물들고, 싱싱했던 꽃들은 시들고, 뜨거웠던 사랑도 식어 버릴 수도 있다. 나의 아내가 종종 말하는 "애 셋 낳고 변하지 않으면 바보다"라고 말하는 것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아내의 변화된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내에게 항상 "초심을 잃지 마라"라고 강압은 하지만, 연애시절의 설렘과 열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자리를 잡아 아내의 초기 사랑 마음이 변했다. 아이들과 비즈니스일로 바빠 나에게 신경 쓰는 마음이 소홀해진 느낌이다. 가끔 데이트하러 뒷동산에 올라가기는 하지만. 무드 잡고 뜬금없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간지럽다. 또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아주 유명한 대사 중에 사랑의 한 면을 정의해주는 내용이 있다. 3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남편이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보, 당신 나 사랑해?" 느닷없이 이러한 질문을 받은 아내가 다음과 같은 답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당신의 자녀들을 낳아 30여 년을 기르고, 항상 당신을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당신이 늦을 때면 기다리고, 당신의 옷을 정성스레 빨래한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굳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의 나와 아내는 이런 관계일 것이다.
또 하나의 부부간의 말 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수필이 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김소운 님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의 밥과 걸인의 찬'이라는 문장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 머릿속에 깊게 감동을 받은 사랑 얘기인가 보다. 지금 시점으로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면 '글쎄'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아무튼 젊은 시절 한번 꼬셔 보려고 '사랑한다'라는 말을 너무 남발했나 보다. 나이가 들어서 그 말을 하기가 많이 간지럽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것이 있어 오늘도 서로를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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