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 자연은 그 존재감을 뽐내며 나뭇가지에 살을 붙이고 눈 녹은 땅에서는 새싹들을 올려 보낸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봄에 언제나 화려함만으로 치장할 수는 없다. 때로는 그 봄의 시작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어느 집에서는 봄에 새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기도 하지만, 어느 집에서는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의 무한한 순환 속에서도 우리 인간은 간과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항상 서있다.
옆집에는 순이라는 한국 할머니가 한 분 살고 계신다. 이사 온 첫날, 낯선 우리가족을 향해 따뜻한 인사를 건넨 그분은 어느새 우리 가족의 삶에 가장 친한 이웃사촌이 되셨다. 그분은 홀몸으로 아들 하나를 성장시켜 출가시키고 혼자 사신다. 한국에서 건너와 타국에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이겨내며 살아가시는 모습은 마치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뚫고 피어나는 꽃처럼 항상 강인함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삶의 끝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순이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셨다. 겨울내내 Kidney Fail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디며 수척해진 얼굴을 보곤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 고통을 덜기 위한 수술과 그 후의 투병생활은 마치 겨울의 침묵과 어둠이 그녀의 가족들에서 다시 찾아온 듯하다. 병원에서의 힘든 시간으로 견디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족과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음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링거로 삶을 연장하며, 모르핀으로 아픔을 죽이며 누워서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 정도의 움직임만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의사의 말로는 그녀의 상태가 5-6일 정도의 시간이 최대일 것이라고 말을 한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엇인가를 말을 하고 싶듯이 손을 꼭 쥐는 힘이 느껴진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고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곧 일어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신력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힘은 아마도 분명히 "포기하지 마라, 항상 희망을 가져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밤거리가 눈으로 덮이면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일어나셔서 눈을 치우곤 하셨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이웃들을 대신해서 도와주는 일들을 자청하셨고, 그리고 이웃들에게 감자를 나누어 주는 '감자 순이'로 통하는 모든 이웃이 좋아하는 한국 할머니였다.
출근하는 길에 만나면 항상 "Safe Drive"로 인사를 해주시고, 퇴근하는 길에 만나면 "Don't do work hard"을 외쳐주신 순이 할머니의 소리가 지금 이 순간,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많은 이웃들이 그녀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그녀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로 눈물을 흘린다. 그녀와 이웃으로 살면서 정다웠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도 눈물이 난다. 다른 주에서 급하게 온 아들, 손자들, 조카들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얼굴을 한번 더 손으로 만져본다. 그들의 얼굴로 그녀의 깊은 잠에 든 것같은 얼굴을 비빈다.
순이 할머니와의 작별은 정말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죽음 그 자체,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 가족과 이웃 사랑,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 매일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 무엇보다도 순이 한국 할머니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아름다운 마음이 잊히지 않을 것이다.
'생활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20) | 2024.04.06 |
---|---|
마케팅없는 재능은 숨겨진 보석과 같다 (18) | 2024.04.04 |
작용과 반작용은 자연의 법칙이다 (23) | 2024.04.02 |
30년 지기 친구는 버리지 말자 (20) | 2024.03.31 |
봄처녀 제 오셨네 (28) | 2024.03.29 |